창업주 포함 역대 사장 3명 독립운동가 출신 화제

격동의 역사속에서 이윤추구보다 애국·애족정신 펼쳐

기업의 존재 목적은 분명 이윤추구이다. 기업은 이윤을 극대화 하는 과정에서 생산과 고용을 창출하며, 나아가 사회와 국가 번영의 근간이 된다. 최근 들어 기업의 윤리경영,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정부주도하의 경제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기업의 생산성 향상과 외형적 성장만이 강조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동화약품은 국가존립 자체가 위태롭던 일제강점기에 국가가 존재해야 기업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일찌감치 깨닫고 국가의 자주독립에 힘썼던 기업이다. 동화는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수많은 경영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민족정신만으로 기업을 운영해 왔다. 창업주를 포함한 역대 사장 3명이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 회사 내에 상해임시정부와의 비밀연락기관이 존재했고 독립자금을 지원한 점 등이 이를 증명해 준다.

110년을 지켜온 한국 기업사 산증인
동화약품은 국내 최장수 기업으로서 동일상호, 동일장소, 동일상품으로 110년을 지켜온 민족기업이며, 동화의 역사는 바로 한국 기업사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외세의 침입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던 구한말(1897~1909), 경제적 수탈과 조선인 기업말살,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탄압을 받던 일제시대(1910~1945), 근대사를 거쳐 무질서와 혼란의 해방(1945~1949), 동족간의 전쟁으로 황폐화되었던 6.25전쟁(1950~1953), 4.19의거(1960), 5.16 군사혁명(1961), 광주 민주화 운동(1980) 등 현대사에 이르는 격동의 역사속에서 110년이라는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대 동화약품 경영자들의 애국정신과 민족정신이 있었다.
 
초대사장 민강 선생, 한국약업계 선각자
동화약품의 초대사장인 민강(1883~1931)선생은 1884년 충북 청원에서 출생했다. 1909년 민강사장은 안희제, 윤세복, 서상일, 김동삼 등 80여 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대동청년당을 조직하고 국내외를 통해 지하공작을 하다가 경술국치를 당하자 여러 동지들과 같이 조국광복을 위하여 목숨 바칠 것을 맹세하고 활약하는 한편, 남대문밖에 소의학교(현 동성중고교)를 설립하고 2세 교육에 힘썼다.
1919년 3.1독립만세 운동이 당시 민강 사장은 한성임시정부 수립운동에 관여하는 한편 비밀결사조직인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했다. 대동단은 제1차 행동으로 의친왕 이강공을 상해로 탈출시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탈출은 압록강 건너 안동역에서 실패로 끝났다. 그 결과 대동단 간부는 거의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민강 사장도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민강 사장이 옥고를 치른 후 동화는 크게 위축되었다. 특히 ‘감시원이 필요한 양의 약품을 무상으로 가져올 수 있다’고 규정한 ‘약품 및 약품 취체령’에 따라 검사 또는 실험이라는 명목으로 약을 마음대로 빼앗아 가기도 때문에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기간 중 동화에는 비밀리에 서울연통부(聯通府)가 설치됐다. 서울연통부는 1919년 7월 상해임시정부가 비밀연락 행정의 첫 조치로서 국내와 국외를 연락하는 방법으로 연통제를 실시함에 따라 서울에 설치한 비밀 행정부서였다. 이 연통제는 국내 각 시, 도, 군, 면까지 조직을 갖추고 각종 정보와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연통부 활동은 1922년 일제에 의해 전국의 여러 조직이 적발되어 주춤하게 됐다.

이 같은 활동을 기념하여 1995년 8월 15일 광복절 50주년을 맞아 서울시에서 본사 부지에 연통부 기념비를 설치해 독립운동을 한 뿌리깊은 민족임을 널리 알렸다.

민강 사장은 독립운동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 11월 4일 건강악화로 별세했다. 그는 한국약업계의 선각자요 독립운동가이며 교육가였다. 대한민국 건국 후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1963년 3월 1일자로 건국훈장 독립장(훈기번호 000242)을 수여했으며, 현재 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동화약품 현대화의 기틀을 마련한 5대 사장 보당 윤창식(1890~1963) 선생은 1890년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났다. 18세까지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나 뒤늦게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대응키 위해 보성고등보통학교 및 보성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 상과에 입학, 신학문을 배웠다.

학교를 졸업한 뒤 일제치하에 이 겨레의 자주경제의 발전을 위해 국산품 애용을 장려할 목적으로 1915년 3월 민족경제 자립을 목적으로 조직한 항일비밀결사조직체인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契)를 조직. 총무에 피임되어 육당 최남선, 최규익 등과 함께 민족혼을 고취하고 국산품 애용운동을 펴다가 1917년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조선독립운동 국내기간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의 간부로서 조국광복운동에 힘쓰는 한편 1937년에는 민족보건산업의 육성을 위해 당시의 동화약방을 맡아 사명을 동화약품공업주식회사로 개명하고 현대적 기업으로 발전시켰다.

1945년 해방뒤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부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서울시의원과 숙명여자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과 자선사업단체인 보린회(保隣會) 창립자 등 여러 직책을 맡아 교육에도 힘썼다.
또한, “좋은 약이 아니면 만들지 말라. 동화는 동화식구 전체의 것이요, 또 이 겨레의 것이니 온 식구가 정성을 다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기업으로 이끌어라”라는 유훈를 남겼으며, 이러한 윤창식 사장의 경영철학은 후대 경영자들에게도 이어져 동화약품 경영이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보당 윤창식 사장은 민족기업가의 뜻, 즉, 민족기업을 “우리의 자본으로, 우리의 제약기술로, 우리의 노동력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영세 중소기업 민족자본을 육성시켜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는 민족기업가적 성격을 소유한 인물이다.
윤창식 사장의 대를 이어 윤광렬(1924~ ) 現회장도 광복군으로 활동했었다. 윤회장은 유년시절부터 선친의 독립운동 활동을 계속 지켜보면서 애국, 구국정신을 자연스럽게 배우고 실천하게 되었다.  보성전문학교 재학중 1944년 일제에 의해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었지만, 1945년 일본이 연합군에 패망하자마자 탈영하여 자발적으로 상해에 있는 정부군을 찾아가 주호지대(駐戶支隊) 광복군으로 편입돼 5중대 중대장직을 맡았다.
동화약품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한마디로 오랜 역사만큼이나 시련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동화약품은 민족의 역사와 함께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우리민족의 건강은 우리 손으로 지킨다’는 사명감과 긍지로 국내 기업사의 전무후무한 110년 역사를 이어왔다고 할 수 있다.


동화약품공업㈜ 회사 소개
동화약품공업㈜(사장 윤길준, www.dong-wha.co.kr)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제조회사 이자 제약회사이다.
조선말기(1897년 9월 25일) 우리나라 최초의 양약 '활명수'를 개발한 이래 민족의 역사와 함께 민족의 건강을 지켜 온 110년 전통의 기업이다. 동화약품은 최고(最古)의 제조회사이자 제약회사, 가장 오래된 등록상표 부채표, 최장수 의약품 활명수 등 총 4개 부문에 걸쳐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

동화약품은 현재 까스활명수, 후시딘, 판콜에이, 비타천 등 400여종의 우수의약품과 30여종의 원료의약품을 생산, 국내 공급은 물론 세계 40여 개국에 수출하는 명실상부한 일류 제약기업으로 성장했다.

첨단 의약품 메이커로 도약하기 위해 신약개발에 주력한 결과, 2001년 7월, 세계 최초로 간암치료용 방사성 의약품인 ‘밀리칸주’를 개발해 제약사의 한 획을 그었다. 뿐만 아니라, 2007년 6월에는 자체 개발한 신약물질인 DW224a(퀴놀론계항균제)를 美 Pacific Beach Biosciences에 기술수출한데 이어, DW1350(골다공증치료제)을 美 P&G 제약에 국내 제약사상 최대규모인 5억 1,100만불에 신약기술을 수출하는 쾌거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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